사랑하는 아버님을 주님 품으로 보내 드리면서 목양칼럼 / 2017년 08월 01일

얼마 전 제 아버님 한철수 목사님께서 이 땅에서의 85년 인생을 마치시고 주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캄보디아 선교대회를 떠나기 전부터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지시더니 다녀와서 이틀 뒤에, 미국에 계시던 누님이 들어오셔서 몇 시간도 되지 않아서, 마치 자녀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처럼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찬송하는 가운데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눈에서 진물이 나도록 울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부모님의 죽음을 호상이라 하지 말라”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천국 소망이 있었기에 우리 가족은 모두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습니다.

한국이 식민지 지배와 전쟁과 가난으로 신음하던 때에 태어나셔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버님은 신앙심 깊은 할아버지 장로님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시고 신학교에 들어가셨습니다. 한상동 목사님과 박윤선 교수님 같은 영적 거장들 밑에서 수학하시며 고려신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신 아버지는 미국으로 가서 더 공부를 해서 신학 교수가 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되지 않아 유학을 가지 못하시고 20년이 지나서야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되던 해에 우리 가족은 미국 캘리포니아 LA에 정착했습니다. 아버님은 바로 개척교회를 시작하셨는데, 교회가 잘 성장하지 못하여 두 번이나 문을 닫는 아픔을 겪었고, 우리 가족은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며, 생계를 위해서 온갖 육체노동을 다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런 힘든 와중에서도 아버님은 목회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가난이 싫었던 저는 아버님이 목사이셨던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나는 나중에 커서 가족을 고생시키는 목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목사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라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가난한 형편에도 아버님은 항상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선교사님들이나 힘든 목사님들을 보면 입고 있던 옷이라도 벗어 주시면서 도우셨습니다. 아버님은 또한 다방면으로 재주가 많으셨습니다. 독학으로 영어, 독어, 일어, 중국어 등을 공부하셨고, 피아노와 성악도 혼자 공부하셔서 항상 찬양하기를 좋아하셨고, 클래식과 가곡에 조예가 깊으셨습니다. 목수 일도 잘하셨고, 야채와 꽃 키우는 일도 좋아하셨습니다.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책을 사서 보셨습니다. 교회 초창기에 새벽 기도가 끝나면 어르신들과 함께 새벽 간식을 드시면서 정말 다방면에 걸쳐 폭넓은 대화 나누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유머 감각도 남다르셔서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막내아들인 제가 하는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들어주신 평생 제 광팬이셨습니다. 항상 우리 부목사님들을 격려해 주셨고, 제게 부교역자들을 세워주고, 장로님들을 격려하며, 교인들을 사랑하라는 당부를 계속해 주셨습니다. 새로운교회 개척 초창기에는 항상 새벽 기도의 자리를 함께 지켜주시면서 제 뒤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 주셨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목회 생활 가운데서도 늘 꿈을 잃지 않았던 우리 아버님은 생 덱쥐베리의 소설에 나오는 어린 왕자처럼 딴 세상에서 온 소년 같은, 너무나 세상적이지 않은 순수함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기도와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한 홍 목사도 있을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의 사랑과 위로 가운데 아버님의 장례 일정을 너무나 은혜롭게 마칠 수 있었기에 다시 한 번 이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주님 옆에 계신 아버지. 마음은 있어도 표현 잘 못하는 이 아들이 이제야 고백합니다. “아버지, 정말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평안히 쉬세요. 벌써 많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