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들은 이야기인데, 요즘 일반사회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카톨릭의 상징적 인물은 전에는 김수환 추기경이었는데, 요즘은 “울지마 톤스”로 유명한 고(故)이태섭 신부라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돌보다가 48세의 나이에 숨을 거둔 그의 이야기는 다큐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지요. 불교계의 상징적인 인물로는 이전에 법정 스님이었는데, 요즘은 혜민 스님이라고 합니다. “멈추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를 강조하는 하바드 출신의 젊고 잘생긴 혜민 스님이 책이나 강연, SNS로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럼 개신교는? 안타깝게도 개신교는 딱히 없을뿐더러, 요즘에는 오히려 안 좋은 쪽으로 알려지는 지도자들이 더 많다고 합니다.
목사로써 저는 너무나 가슴이 답답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거나 핍박을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거룩한 영향력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감동시킬만한 메시지, 그 메시지를 삶으로 살아내는 목회자나 평신도들을 점점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상황을 교회의 영적인 격이 떨어져 버린 것이라고 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번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 시간들을 통해 제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기독교의 핵심인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붙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복음에 사탕발림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그저 편안하고, 재미있는 곳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합니다. 기독교는 교육 기관이 아닙니다. 내 옛 사람을 잘 가르쳐서 개발시키는 곳이 아닙니다. 그저 “긍정의 힘”을 가지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면 만사형통이라고 가르치는 곳도 아닙니다. 또한, 교회는 “너는 잘못된 환경의 희생양일뿐이야”라고 무조건 위로하고 다독이는 무책임한 치유센터도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복음에 물을 섞어 버린 잘못된 기독교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에는 힐링(healing)이 대세라고 하지만, 진정한 힐링이 있으려면 내 옛 사람을 확실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킬링(killing)이 있어야 합니다. 교육은 “나는 모른다”는 겸손에서 시작하지만, 신앙은 죽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죽어야 확실히 살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 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 위에 이것 저것 더하려는 시도들이 오늘날 현대 교회 안에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 플러스 심리학, 예수님 플러스 철학, 예수님 플러스 엔터테인멘트 등… 그러나, 예수님 만으로 충분합니다. A.W. 토저가 말한대로 십자가에 물감 칠해선 안 되고, 꽃 장식을 해서도 안 됩니다. 십자가 복음 외에 자꾸 다른 무엇을 더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는 십자가일 뿐입니다. 원색적인 십자가 복음을 우리는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만으로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 문제입니다.
너무나 많은 크리스챤들이 세상이 두려워서 복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교회를 자기 방식대로 길들이려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독선적이라고 비난합니다. 그게 싫어서 우리는 십자가 복음에 너무나 물을 섞어 버렸습니다.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교회를 너무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어렵지만 그 고통이 영원하진 않습니다. 십자가 끝에는 부활의 승리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 승리는 십자가에서 확실히 죽는 자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로 돌아갑시다. 그것이 한국교회가 살 길입니다.
십자가로 돌아가자
목양칼럼 / 2013년 04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