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게도냐인 목양칼럼 / 2024년 11월 01일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가 조선 땅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손에는 겨우 두 달 전에 한글로 번역된 마가복음 성서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 성경책은 호남 선비 이수정이 일본에서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호남 선비가 어떻게 일본에서 한글 성경을 번역할 수 있었을까요? 홍문관 교리까지 지냈던 이수정은 임오군란 때 민비를 구한 공을 인정받아, 일본으로 가는 사신단에 끼어 40살의 나이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습니
다. 당시 메이지 유신의 전초기지와도 같았던 요코하마는 온갖 서양 문물과 사람들, 그리고 근대화하는 일본의 활기찬 모습으로 별천지 같았습니다. 이수정은 “어서 빨리 우리도 서양 문물을 배워서 일본을 넘어서는 나라가 되어야지”라는 결심을 합니다.
평소 일본의 선진 농업 정책에 관심이 많았던 이수정은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저명한 농학자 쓰다센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쓰다센의 집에 걸려 있던 한자로 적힌 산상수훈 액자를 보고 충격을 받았고, 쓰다센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함께 일본으로 왔던 수신사 일행이 귀국한 뒤에도 이수정은 일본에 남아 더 깊은 신앙생활에 빠지게 되었고 세례도 받게 됩니다. 이제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농업기술이나 서양 문물의 도입이 아닌 복음이라는 길을 확신한 이수정은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먼저 이수정은 동경으로 유학하러 오는 조선인 학생들을 전도해서 윤치호를 비롯한 30여 명의 유학생이 그를 통해 개종하고 성경공부를 하게 됩니다. 이들은 동경 YMCA 기독청년회를 시작하게 되었고, 훗날 이들은 3.1운동보다 20일 앞서 독립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수정은 일본 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 루미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조선에 선교사 좀 보내달라”는 편지를 두 차례나 보냅니다. “지금이 바로 조선에 복음을 전할 가장 좋은 때이니 일꾼들을 보내 달라”는 간절한 호소였습니다. 이 서신으로 인해 이수정은 자신의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달라고 요청한 “조선의 마게도냐인”이라 불리게 됩니다. 이수정의 이 편지는 미국의 많은 선교 잡지에 실리게 되고, 이를 읽고 감동받은 미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 뒤 조선으로 선교사가 되어 오게 됩니다. 이때 이수정의 학문이 뛰어나고 복음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것을 본 루미스 선교사가 그에게 조선말로 성경을 번역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는 먼저 한문성서에 조선어로 토를 다는, 현토 한한신약성경을 번역했으며 한자를 모르는 조선 백성을 위해 순수 우리말 성경 번역에도 착수했습니다. 그는 장수가 가장 짧은 마가복음을 골라 번역을 시작했고, 1885년 2월 드디어 번역된 마가복음 1000부가 발행되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선교사가 한국으로 들어가기 전 두 달을 요코하마에서 머무를 때 이수정은 그들에게 막 완성된 한글 마가성경을 주었고, 조선말과 문화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후에도, 이수정은 이어서 신약성서 마태, 마가, 요한복음과 사도행전까지 짧은 시간에 번역합니다. 이수정이 일본에 머물렀던 기간은 겨우 4년.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예수를 믿고 거듭난 그를 하나님
은 놀랍게 사용하셨습니다. 얼마나 신앙 경력이 오래되었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에 헌신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헌신을 크게 쓰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