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출제 오류 논란을 빚었던 올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영어와 생명과학II에 대해 복수정답을 인정했다. 이로 인해 수천명의 수험생들이 불이익을 당하게 돼 파장은 심각한 듯싶다. 오죽하면 대통령까지 나서서 수능시험 출제 방식을 전면 재검토하라는 서릿발 같은 명령을 내렸을까.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쉽게 고쳐질까 싶다.
해마다 온 나라를 몸살 나게 하면서도 좀체 개선되지 않는 우리의 대학 입시 시스템. 한국 시험 문화의 뿌리를 추적하면, 입신양명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던 과거제도일 것이다. 고려 광종 때 도입되어 조선시대 내내 지속된 과거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라지고 근대식 시험인 고등문관 시험으로 바뀌게 된다.
60년대 말까진 중학교도 입학시험을 치러서 들어간 까닭에 국민(초등)학생들도 입시 공부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 70년대 초 ‘7·15 어린이 해방’을 통해 중학 무시험 입학이 도입되고, 학생들은 이른바 ‘뺑뺑이’라고 불렸던 추첨으로 학교를 배정받았다. 고등학교도 무시험으로 진학하는 고교 평준화는 74년 대도시에서 시작됐다. 대입 예비고사가 치러지던 70년대 학교에서 실시된 아이템플 모의고사는 자신의 전국 순위를 알아볼 수 있는 시험으로 유명했다. 명문대 입시나 사법시험은 인생역전, 신분상승의 도구였기 때문에 모두가 거기에 목숨 걸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성적보다 기초실력 폭넓게 쌓아야
역사적으로 경쟁시험 제도는 출신 배경과 연줄로만 지배층에 편입될 수 있었던 오랜 관행을 깨 버림으로써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러나 우리의 입시 열기는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쳤다. 얼굴이 누렇게 뜰 정도로 공부하면서도 입시 장벽에 가로막혀 숨도 못 쉬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 유엔까지 “한국의 입시 위주 교육이 아동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과연 우리나라에선 아이들이 여유를 갖고 제 스스로 깊이 생각하도록 할 수는 없을까?
우리나라 교육열은 입시열이다. 학교나 학원이나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성적을 거두기 위해, 정답을 족집게 식으로 가려내는 요령을 가르쳐 시험의 달인들을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시험을 요령껏 잘 치르고 성적을 잘 받아 졸업은 하지만 정작 사회에 나가서는 낭패를 당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라는 거다. 훗날 꼭 필요한 폭넓은 기초 실력을 성실히 쌓아두지 않은 까닭이다.
시험 중심, 학벌 중심의 교육의 문제는 일단 졸업하면 배움을 중단하거나 게을리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데 있다. 그러다보니 사회의 리더들이 자신의 실력을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키지 못하게 되고, 이것이 국가 발전에 치명적인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25∼29세 연령층의 중등교육 이수 비율은 한국이 9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그러나 한국의 35세 이상 성인이 대학 등 각종 재교육 기관에 등록한 비율은 2.87%로 OECD 회원국 중 일본, 멕시코와 함께 최하위 수준이다. 영국의 재교육 비율은 24%에 가까워 우리의 8배나 된다. 호주, 캐나다, 미국도 5배 이상이다. 즉 선진국들은 어른들이 계속 열심히 공부한다는 애기다. 내가 미국에서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주위에서 공부하는 동료들 중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들이 많았다. 배움에 대한 그들의 열정은 젊은이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평생 자신의 분야 개발해 나가는 게 중요
시험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험 성적 자체만을 위해 공부한다면 그것처럼 알맹이 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성적표는 인생 전체를 통해 나오는 것이지, 몇 년간의 학교생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실력을 쌓으라고 시험이 존재하는 것이지, 시험을 위해 실력을 쌓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후계자 디모데에게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항상 사람들 앞에 나타나게 하라”고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분야에서 평생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발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 학생들이나 교육 정책 입안자들이 가슴 깊이 각인했으면 좋겠다.
한홍 새로운교회 담임목사
시험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
바이블시론 / 2014년 12월 01일